-중우결알 발간 개그 소설 <세상에 나쁜 중혁이는 없다> 샘플
-B6 ㅣ 90 페이지 ㅣ 8천원
-구간들과 연결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 수인물이 아닙니다.
․ 에필로그 스포와 날조가 많습니다. (*최신화 반영)
․ 본서의 훈련법은 전문적인 지식 없이 작성되었습니다.
․ 반려견 문제 행동은 꼭 전문가와 상담하세요.
․ 인권상담전화 국번없이 1331
실제 책에는 문단 사이 여백이 없습니다.
분양
“미쳤나, 김독자?”
서늘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비유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우악스러운 손길이 김독자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 이 자식아. 서글픈 말은 채 뱉지도 못하고 슬리퍼를 신다가 급히 백스텝을 밟게 된 몸뚱이가 흐느적거리며 맥없이 거실로 끌려왔다.
“말로 하자, 말로. 뭐가 문젠데?”
“내가 할 말이다. 갑자기 개는 왜 키우려는 거지?”
유중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인터폰 화면으로 향했다. 회의 장소가 둘의 집으로 그새 바뀌기라도 했는지, 컴퍼니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와서 화면에 손을 흔들고 문을 쾅쾅 두드렸다.
“다 꺼져라!”
유중혁이 소리를 질렀지만 김독자는 냉큼 달려 나가 잽싸게 문을 열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여러분, 유중혁이 또 저를 죽이려고 아주, 어휴. 그렇게 고자질을 해대며 뻔뻔하게 히죽거리는 얼굴이 얄미워서 유중혁은 결국 김독자를 한 대 패고야 말았다.
❏
김독자 대표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의 아기 도깨비 비유가 41회차의 신유승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신유승이 둘 있는 것도 물론 귀엽기는 하다만, 역시 요즘 마케팅에서 잘 먹히는 건 털 달리고 귀여운 네발짐승이다. 마스코트를 들입시다!
이 대목에서 동물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속물, 자본주의의 노예, 도깨비도 등쳐먹을 사장놈 등 한 차례 야유가 쏟아졌지만 김독자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걸 제외하고라도 폭신한 털이 그립다, 옆구리에 파고들던 털이 그립다, 부르면 오는 털이 그립다, 아무튼 뭔가 키우고 싶다! 요즘 날이 서늘하니 가슴에 날아와 꽂힐 따끈한 생명체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김독자는 비숑 프리제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하얗고 몽글몽글한, 샴푸 거품을 뭉쳐서 만든 것처럼 생긴 강아지의 모습에 두 신유승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름은 은유나 직유로 할 생각인데요.”
“개를 키우냐 마냐는 둘째치고 이름에서 아웃.”
노조위원장 정희원의 칼 같은 정리가 뒤따랐다. 활유보다는 낫지 않냐는 대표의 주장은 만장일치로 묵사발 되었다. 은유가 그나마 예쁘긴 한데, 비유 다음 은유라고 생각하면 이 컴퍼니 이름이 왜 이 꼬라지인지 알 수 있다고요. 아무튼 개를 들이는 문제로 벌어진 토론에 이름을 가지고 긴 시간을 끄는 건 유중혁의 인내심에 좋지 않아 보인다며 유상아가 중재에 나섰다.
한편 유중혁 공동대표의 입장은 이랬다.
“저놈이 뭘 키울 정신머리가 없다고 본다.”
“동감합니다.”
“그건 맞네요.”
“그럼 김독자 의견은 무시하는 쪽으로.”
“저기요?”
빛보다 빠른 단합과 결론에 김독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맞잖아요, 댁이 어떻게 생명체를 키워요.”
“선인장 하나도 못 키우고 말라 죽일 것처럼 생겨선.”
“그럴 정신이 있으면 네 몸이나 건사해라.”
김독자가 돌아온 후, 소위 높으신 분들은 컴퍼니를 등에 업은 김독자가 다시 서울을 지배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떨었다. 구심점이 없어서 흩어졌던 그들이 모이면 국가 전복은 일도 아닐 거라고 여론을 몰아가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실체가 개 한 마리 키우는 것도 힘든 바지사장이라니, 외부에 알렸다간 큰일 날 모습이다.
그런 뜬구름 잡는 걱정까진 아니더라도, 시나리오 중의 <김독자 컴퍼니>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은 컴퍼니 사람들이 사장을 싸고도느라 정신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희대의 오징어잡이 계획부터 해서, 저 사람들이 얼마나 사장에게 미쳐있는지 다들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컴퍼니 사람들은 그들이 김독자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말과 행동으로 꾸준히 주입했다.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협박이 반, 그러니 자신을 스스로 아꼈으면 하는 마음이 반. 김독자에게 그 사랑은 너무나 달고, 동시에 무거울 정도로 썼다.
하지만 그게 다 눈감아주고 퍼주는 애정이었느냐, 그랬다면 주는 쪽이나 받는 김독자 모두 두드러기가 돋았을 게 뻔하고. 그보다는 우는 아이에게 독감 주사를 맞히러 병원에 끌고 가는 부모의 모습에 가까웠다. 유중혁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걸 주먹질로 막으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서로서로 가장 좋은 동료이자 선생이고 올바른 길이었다. 김독자는 그렇게 쏟아지는 애정과 걱정 속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장난도 치며 살아가는 법을 차츰 배워 나갔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라고 하던 사람들 찾습니다.”
예전의 그였다면 목숨이 걸리지도 않은 사소한 일이니 강한 주장 없이 이쯤에서 의견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독자는 서운해하며 벽을 치는 대신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레 투덜거릴 뿐이었다. 서로 아낀다는 진심이 전제된 상태인 걸 알기에, 이런 일로 상처받는 친구 없는 김독자는 이제 없다. 개 키우는 게 왜 안 돼!
물론 사원들은 사장의 하찮은 어리광에 진심으로 맞섰다. 댁이 뭘 잘도 키우겠다. 그럴 시간에 몸이나 더 돌봐라!
“약관 밑에 ‘과반수의 동의를 얻은’ 일만 가능하다고 써있지 않았을까요? 꼼꼼히 읽고 동의하셨어야죠.”
“‘유중혁이 반대하는 일은 안 된다’는 조항도 붙어있지 않았어?”
“난 처음부터 그런 소리 안 했어요. 마당에 매달자고 했지.”
김독자는 이렇게 반대가 거셀 거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팔짱을 끼며 구시렁댔다. 하긴, 견종부터 대뜸 정하자고 하던 걸로 미루어보건대 ‘개 키울래’에서부터 찬반 토론이 벌어질 거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상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때 은밀한 모략가였던 존재, 위대하신 모략, 손가락과 얼굴이 개연성, 아무튼 그 모든 것이었음에도 유중혁인 한 사람은 아무 흥미도 없다는 듯이 멀찍이서 이 난장판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금 조용해진 틈을 타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 생명을 데려오는 회의치고는 가벼운 언사로군.”
그러자 정희원이 즉시 반박했다.
“무슨 소리예요, 무거우니까 이렇게 결사반대하는 거죠.”
“가벼운 건 김독자 몸무게지.”
김독자의 회사 생활을 기억하는 유상아도 거들었다. 가끔 엘리베이터 점검으로 비상계단을 쓸 일이 생기면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리곤 했다. 그리고 두 층도 다 못 올라서 먼저 가라며 난간을 붙잡고 쉬었었지. 그런 김독자가 개의 운동량을 따라간다?
“독자 씨, 분명 산책 3일 시키고 쓰러져요.”
“난 이틀에 건다.”
“하루나 제대로 나갈까 모르겠군.”
“경매 붙이냐? 경매 붙여?”
점점 줄어드는 숫자에 김독자가 발끈해서 소리를 빽 지르자 이현성이 급히 나섰다.
“아닙니다, 독자 씨! 저는 한 달도 너끈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개의 평균 수명이 10년을 넘긴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튼 키우지 말라는 소리였다.
한편 어른들의 핏대 세운 목청들에 밀려 얌전히 앉아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청소년 조가 슬쩍 김독자를 찔렀다. 김독자는 드디어 든든한 아군이 생기나 하는 기대로 냉큼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우리 사부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거야? 헉, 아니면 혹시 둘의 2세로 강아지를…? 역시 둘의 아이를 생각해서?”
“형, 곤충은 어때요? 형이면 내 온실에 들어와도 돼요!”
“아저씨! 제 방엔 괴수종 사진들도 많아요!”
“난 맹수도 좋아, 아빠.”
“키워질 개가 불쌍하니까 개 사진은 어떠함?”
김독자의 입이 한 자는 더 튀어나왔다. 보통 이 불만을 깨닫고 달래주는 역할의 … 그런 사람이 있었나? 아무튼 뭐라도 입에 물려줬을 사람들은 ‘산책도 못 나갈 김독자의 체력 증진 프로젝트’에 열을 올리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독자의 서러움은 오갈 곳 없이 쌓여만 갔다.
그렇다고 김독자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개를 키우고 싶다고 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얘기하기 쑥스러워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예전부터, 그러니까 친척 집을 전전하던 때부터 개를 키우는 집을 동경해왔다. 어린 김독자에게 강아지란 단란한 가정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만큼 키울 엄두도 낼 수 없었으며, 독립해서도 여건이 되지 않아 생각도 할 수 없던 것. 이렇게 평화로운 지금에서야 한 자락 욕심을 내비칠 수 있는 정도로 그에겐 너무 멀었던, 평화로운 아침에 연인의 품에 안겨서 부스스 잠에서 깨면서 겨우 기억해낸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일단 종을 정하고, 이름도 정해놓고, 개를 데려오기 전에 반려동물을 키우는데 필요한 지식들을 공부하려고 했다. 그러기 전에 역시 종은 모두와 상의하는 게 좋겠다며 보낸 가벼운 톡 하나가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은 정말 몰랐다.
그렇다고 ‘제가 어린 시절부터 꿈이 있었습니다…’라고 호소하기엔 민망해 가볍게 둘러댔더니, 동료들의 눈에는 6살짜리 어린애가 옆집 개를 보고 우리도 말티즈를 키우자고 말하는 정도의 각오로 보였나 보다. 과보호가 지나쳐 사람(*김독자)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눈까지 필터가 한 단계 들어간 건 아닐까.
결국 김독자는 이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손뼉을 쳐 큰 소리를 냈다. 짝짝, 박수 소리가 나자 다들 한 마디씩 보태던 입을 다물었다. 최종 정리의 시간이다. 큼큼, 시선을 모은 김독자는 헛기침을 하며 팔을 벌렸다.
“여러분, 제가 체력이 바닥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바닥한테 사과해라!”
너 좀 조용히 하면 안 되냐? 김독자가 눈을 부라렸지만, 한수영은 외압에 굴하지 않고 혀를 쭉 내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 김독자는 계단이 너무 많다며 집 밖으로도 잘 안 나오고, 이렇게는 못 산다며 주택에 엘리베이터 설치를 주장하고 있는 놈이니까. 별로 회의할 일도 없는데 <김독자 컴퍼니 공식 회의>가 14회까지 이어진 건 절반 이상이 김독자 주최의 엘리베이터 찬반 토론이었다.
“…하지만, 산책은 평소에도 공원을 뛰는 유중혁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고요.”
이게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소리기는 하냐, 드디어 둘을 한 몸으로 보겠다는 소리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이 제안은 악이다 등의 잡다한 소란이 일었다.
“분양을 받기 전에 당연히 애견훈련법에 대해 공부를 하는 등의 노력을 보일 것을 약속드리며, 제가 개를 그냥 귀여워서 들이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네놈이 개를 귀여워하는 것 말고 실질적으로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가?”
“야, 내가 못 할 건 또 뭔데?”
“개에게 변기 작동법이라도 가르쳐줄 셈인가 보군.”
“자, 자. 탁상공론은 그만하고.”
발화자가 유중혁이라 그렇지, 내용만 놓고 보면 ‘예쁘다고 데려와 놓고 엄마가 똥 치울 거 누가 몰라?’ 수준의 대화를 더 견디지 못하고 정희원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독자 씨, 최종 발언은 그걸로 마치는 건가요?”
“여기가 법정입니까?”
“그럼 거수로 결정을…….”
그때 은밀한 모략가, 오리지널 유중혁, 이계의 중혁, 아무튼 유중혁의 뒤에서 우물쭈물하던 작은 김독자가 몸집만큼이나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다.
“저도 강아지 키워보고 싶었어…요.”
“키우죠.”
“비숑이 좋다고 했나, 김독자.”
“산책 담당 정하고 분양처 알아보면….”
“저기요?”
큰 김독자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유상아가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독자 씨, 어린아이 정서에는 반려동물이 좋대요.”
“그래도 공부는 따로 해오고.”
그렇게 오래 이야기한 것이 무색하게 상황이 정리되어 버렸다. 아니, 왜? 이럴 거면 9페이지나 개연성 할애할 필요 있던 거야?
「아직도 최고의 설득 방법은 솔직함이라는 걸 모르는 김독자는 혼자 억울함을 불태웠다.」
아니, 이딴 서술 넣지 말고…!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유상아는 김독자를 염두에 두고 말했지만, 사실 이 둘은 정말로 <동물농장>에 출연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주종 관계는 바꿔서 말이다. 가사 능력이 출중하고 외모는 범우주급으로 출중한 우리 집 개새끼가 입질이 너무 심한데요… 참을성도 없고요…. 행동 교정이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 예리한 관찰력과 스마트한 브레인, 반려견 행동 교정사 선생님을 모셨다! 선생님, 우리 뽀삐 왜 이러는 걸까요? ]
그러게요, 우리 중혁이 왜 이러는 걸까요?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었으면 이놈을 저기 내보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선생님, 우리 집 개자식도 갱생이 가능한가요?
김독자는 갓 지은 따끈따끈한 밥을 잘 말아서 숟가락에 올렸다. 윤기가 흐르는 쌀알이 굴러다니는 것이 꼭 유중혁에게 굴려지는 자신의 모습 같았다. 개는 훈련하면 말이나 듣지, 유중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뽀삐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던 걸까, 굳어지는 선생님의 표정… 보호자들도 덩달아 긴장되는 상황! ]
이렇게 오늘따라 예능이 다큐멘터리 같을 수가 없다. 김독자는 거의 자신의 심정을 밑에 자막으로 달아주는 것 같은 더빙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나는 이대로 유중혁의 미친 과보호로 이 집에 갇혀 살게 되는 걸까? 유중혁 미친 새끼, 진짜 캐붕이다…….
「그래서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 갱생 프로그램을 찍어보는 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유중혁한테 갱생 여지가 있었으면 진작 사이코패스 기질부터 고쳤지. 입 안 가득 한 숟갈을 퍼 넣은 김독자의 볼이 티 나지 않게 부풀었다.
한편 화면 속 뽀삐와 가족들의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하, 저것 봐. 우리 중혁이가 네발짐승이었으면 딱 저랬겠다. 저것보다 한 100배는 사람 족칠 것 같겠지만.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흰자를 내보인 채 이빨을 드러내는 작은 말티즈 얼굴에 유중혁이 겹쳐 보였다.
[ 틈만 나면 물어뜯는 말썽쟁이 뽀삐의 입질! 과연 고칠 수 있을까요? ]
「틈만 나면 물어뜯는 미친 유중혁의 입질! 과연 고칠 수 있을까요?」
[제4의 벽]의 텍스트가 자연스럽게 자막과 싱크로를 맞췄다.
김독자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저 문장이 의외로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을. 유중혁은 사실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깝잖아? 유중혁…… 갱생…… 안 되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유레카에 가까웠다. 김독자는 잘 말아서 올려둔 밥을 툭 떨어뜨렸다.
“주워라.”
“어.”
그래, 내가 이 생각을 왜 못 했지? 김독자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유중혁의 문제점은 전부 멍멍이들의 행동으로 치환이 가능했다. 그럼 같은 방법으로 교정도 되지 않을까? 김독자의 작은 머리통이 바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최근 공부한 모든 이론과 시청하던 방송의 장면들이 유중혁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건… 된다!
밥을 먹다가 벼락 맞은 것처럼 굳은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은 혀를 찼다. 몸으로 익히는 건 뭐든 못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TV 보면서 밥 먹는 수준의 멀티도 못 하는 멍청이일 줄은. 김독자의 머리통 속에서 무슨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유중혁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버렸다.
그날부터 김독자의 반려동물 분양 전 공부는 조금 다른 길로 새기 시작했다. 수시로 드나드는 유중혁 탓에 멋들어진 정리는 할 수 없었지만, 곳곳에 악필로 휘갈기며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계획서를 써나가는 김독자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수많은 이론서를 추리고 추린 끝에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참을성을 가르치고 의존성을 줄일 방법들을 찾아내 암호처럼 필기를 끝마쳤다. 두꺼운 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떨어졌다.
작전명 <세상에 나쁜 중혁이는 없다>, 시작한다.
솔루션
뭐든지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는 사랑이라 말하고, 또 누구는 인간의 생존 의지를 꼽을 것이다. 멸망하기 전 모 아이돌은 ‘넓적부리황새’를 고르기도 했다.
김독자는 다 틀렸다고 단언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 그건 바로 유중혁의 미모다. 굳게 다문 입, 알프스산맥처럼 깎아지른 콧날, 나이를 먹을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어지는 눈동자… 나이 든 유중혁이 어떻게 더 멋있어지는지 이미 엿본 김독자는, 그 미모가 시들면 버려 주겠다는 말은 농담으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김독자는 유중혁이 [등장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발 그럼 저 외모가 현실에 존재한단 말이냐? 거짓말 마라 너어는 틀림없이 픽션 속의 얼굴이고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이며 누군가 네 얼굴을 빚어냈다면 미켈란젤로가 대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데 걸린 시간과 열정보다 더한 정성을 쏟았을 거다’라는 편견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동료들에겐 그다지 먹히지 않는 외모거늘, 유독 그는 변함없이 유중혁의 외모에 눈부셔했다.
김독자가 <세상에 나쁜 중혁이는 없다> 계획을 짜면서 가장 많이 반성한 부분도 그것이다. 내가 우리 중혁이 얼굴과 목소리와 몸매와 가슴과 근육 등에 넘어가서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김독자는 냉정하게 유중혁의 단점을 정리했다. 앞뒤 양옆에 바지 속까지 살펴봐도 외형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고, 역시 성격이 문제지. 이 개 같은 성격을 초반 회차의 귀여움이라고 받아주기엔 제 몸집을 생각 않고 달려드는 대형견의 안아줘 어택과 같은 육중함이 있었다. 유중혁이 고쳐야 할 성격적 결함, 함께 생각해 볼까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김독자는 손에 모터를 단 것처럼 마구 써내려갔다.
그 결과, 유중혁의 흠 잡을 곳은 너무… 많았다. 이걸 다 고치려다간 늙어 죽으면서도 아직 너를 완전히 인간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후회에 찬 유언을 남기게 생겼다. 제가 제페토 할아버지 같은 인내심이 없어서요. 이건 좀 무리입니다. 김독자는 마음속 신청서를 반려했다. 그렇다면 이 중에 교육해서 성과를 볼 수 있을, AS가 가능한 문제점은 뭐가 있을까? 김독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소개서 성격란을 이렇게 열심히 고민했으면 미노소프트보다 좋은 곳에 합격했었을 텐데.
아무튼 그 어느 때보다 공들여서 수많은 사이코패스 기질과 온갖 불만 사항을 구구절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 마침내 김독자는 결과물을 셋으로 추려냈다.
유중혁의 단점: 흥분을 잘 함. 참을성이 없음. 혼자 있기를 싫어함.
한수영
[ 잠만 ]
[ 반려견=유중혁 ]
[ 흥분되는 대상=너? ]
[ 중간에 끼어들 게 나라면 널 죽일 거야 ]
[미쳤냐]
[내가 몸으로 막을거임;]
한수영
[ㅇ... 신박한 개소리네]
[걍 갖다 대주는거 아닌지]
[아니다 이 악마야]
김독자는 슬픈 얼굴로 몇 시간 전의 대화방을 올려 보았다. 한수영의 [예상 표절]은 적중률이 기똥차기로 유명했지. ‘천재 미소녀 작가님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우매한 중생아.’ 어디선가 한수영의 재수 없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김독자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바디 블로킹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 계획의 맹점을 깨달은 건 이미 실행한 뒤의 일이었다.
김독자는 평소처럼 누워서 데굴거리던 중, 문득 유중혁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로 그게 다였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무슨 섹스어필을 받은 건지, 유중혁의 눈빛이 시방 위험한 짐승처럼 빛났다.
그 순간 김독자는 눈치챘다. 지금이 바로 바디 블로킹의 때라는 걸. 그래서 그는 잽싸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 된다는 눈빛을 쏘며 양팔을 교차해 가슴에 얹었다. 완벽한 방어 태세였다. 덤벼라, 개복치. 오늘의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그래, 내가 멍청했다. 저 자식을 힘으로 이기려고 하다니. 그대로 위에서 덮쳐 누르는 유중혁의 육중한 몸을 받으며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김독자의 머릿속에는 순간 [갖다 대주다]라는 단어밖에 남지 않았다. 막으려던 이불과 팔은 아주 큰 방해가 될 뿐이었고, 애초에 (주어가 유중혁이고 목적어가 김독자인데 이렇게 표현하는 상황이 어색하기 그지없었으나 어찌 됐건 용어상) 흥분 대상이 스스로 블로킹하는 상황은, 슬프지만 한수영의 말대로 개소리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 개가 다리를 물어요’라고 하는 사람에게 ‘다리로 막아보세요’라 대답하면 잘도 되겠다. 막으려던 다리만 물어뜯기겠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옛말 틀린 게 없다. 잔뜩 물어뜯기고 난 뒤에야 깨달음을 얻은 중생의 삭신이 비명을 질렀다.
물론 김독자가 원통해 하거나 말거나 유중혁은 방금 씻어 뽀송해진 몸을 뒤에서 빈틈없이 꽉 껴안고 있었다. 곁눈질로 본 놈의 얼굴이 아주 만족스러움으로 가득한지라 괜히 더 짜증이 났다. 괜히 심술이 일어 다리로 이불을 펄럭이자 개자식의 뒷다리가 장독대 누르는 돌 마냥 묵직하게 얹혔다. 제대로 된 바디 블로킹의 시범이었다.
김독자는 여기서 개와 유중혁을 어느 정도 따로 놓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개에게 하는 방법을 그대로 가져왔다간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좋은 실패 사례가 생겼다. 그렇다고 발정하는 유중혁에게 ‘우리 뽀삐 흥분했니?’하고 중성화 수술을 시킬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유중혁 버전으로 로컬라이징해야 했다.
그래, 이 자식아. 처음이니만큼 이번에는 준비 단계부터 미흡했던 나의 실수로 넘어가 주지. 하지만 다음 솔루션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김독자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바디 블로킹을 마음 속 계획서에서 싹싹 지워냈다.
포기를 모르는 김독자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으로 돌아갔다. 자고로 개 훈련은 앉아, 기다려, 손이 기본 아니던가. 괜히 [흥분도를 낮추는 훈련법]에 눈이 돌아가서 되도 않는 힘을 쓰려고 한 게 패인이다. 이번엔 정말로 된다.